선조는 과연 찌질하기만 한 군주였을까? 역사탐구歷史探究


( 노량해전 이후 충무공에 대한 명군의 평가 에서 트랙백 )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은 아주 확실하다.


이순신 = 레전드 오브 레전드 , 훌륭한 분 ,


선 조 = 찌질이 중의 찌질이 .

( ‘찌질이’ 라는 속어가 '무능하면서 동시에 못났으면서 동시에 자기 욕심만 채운다는' 다중적인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한 것 같다. )



특히 정유년의 원균 재기용과 충무공에 대한 억울한 처벌은 선조가 ‘찌질한’ 임금으로 두고두고 욕을 듣게 되는 가장 큰 근거가 된다. 이 부분은 분명히 선조의 큰 실책이며 덕분에 막강한 조선수군과 삼남의 백성 수십만이 억울하게 전몰하고 말았으니 변명하고자 해도 변명할 거리가 없는 사건이 분명하다.  당시 충무공 처벌에 동조했던 조정 관료들 역시 모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충무공이 임진왜란에서 화려하게 두각을 나타내기 전 충무공의 행적을 살펴보면 세간에 그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녹둔도 전투와 충무공의 제1차 백의종군이다. ( 참조  녹둔도 전투에 대한 '충무공 유사'의 기록 ) 참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 가등청정 간첩 요시라 관련된 백의종군이 무려 2차 백의종군이다. '장군' 께서는 남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백의종군을 두번 씩이나 하셧던 것이다. ( 백의종군은 사형에 필적할 만한 중대한 범법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형벌이다 )

 

( " 훗 백의종군? 억울한 누명? 그딴 건 이미 겪어봤지" by 통제사 )




때는 임란 4년전 충무공이 고작 북방 끝자락 정4품 만호직에 있을 때였다. 당시는 북방개척을 국시로 삼고 있던 시기로 북변 곳곳에 남도에서 온 개척민촌이 있었고 여진족으로부터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조그만 진지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녹둔도 라는 두만강 끝의 작은 섬의 개척민 마을을 지키기 위한 만호진이 바로 조산만호였다.

 

충무공이 임지에 떠억 부임하고 보니 진을 지키는 군졸은 고작 수십인에 수비할 곳은 많고 여진족은 추수가 끝난 개척민 마을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었던 듯싶다. 이에 충무공은 직속상관이자 조선의 대 여진전선 최고위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증원을 요청한다. 상관이 관내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는 것도 못하게 할 정도로 상하를 가리지 않고 강직하며, 또한 이미 병법을 통달한 충무공이었으니 그 요청은 정정 당당하고 합리적인 요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일은 충무공의 병력증원 요청을 무시해 버린다. 이일 입장에서야 가용 병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고 최대한 좋게 이해해주자. ( 자세한 당시 사정이야 우리가 알 수 없으며, 이일 역시 당시 조선에서 알아주던 무장이었으니 ) 문제는 이렇게 병력증원을 못받은 상태에서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당시 ‘사건‘의 진행을 이충무공유사 는 다음과 같히 전하고 있다.

 

“ 8 월에 오랑캐가 과연 군대를 일으켜 안개가 자욱한 때를 틈타 아군의 성책을 포위하였는데, 성책 안에는 군졸 10여 명밖에 없었다. 순신이 성책의 문을 닫고 손수 활을 쏘아 그 아군 진영에 접근해온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니, 오랑캐가 놀라서 달아났다. 이에 순신은 단기(單騎)로 성책 문을 열고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쫓아가니, 오랑캐가 마침내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들이 약탈해간 사람들을 다시 빼앗아 돌아왔다. "

 

이 사건으로 북방 경계선이 뚫리고 조선 병사 11명이 살해당했으며 또한 개척민 160여 명이 납치된다. 신세계에 개척민으로 가면 땅도 주고 부자로 살 수 있다고 남도 백성들에게 광고하고 모집해서 북촌에 정착시켜 놓았는데 그들이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여진족들에게 살해되고 납치당하고 약탈당하고 만 것이다. 군대와 조정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일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충무공유사에서는 “ (북병사) 이일이 적이 침범하게 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을까 염려한 나머지, 순신을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순신을 수감해놓고는 참형시키려고 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 이에 이일이 충무공을 잡아다 놓고 심문하니 충무공이 ” 나는 녹도의 군졸이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누차 군졸을 늘릴 것을 청하였으나, 주장(主將)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부(軍簿)가 여기에 있으니, 만일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면 죄가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쫓아가 우리 쪽 사람들도 다시 빼앗아 돌아왔는데, 패군으로 논죄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엄장하여 좀처럼 패군의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라고 전하고 있다.

 



물론 충무공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북병사인 이일에게 있으며 만약 이 시점에서 ( 당연히 )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순신’이라는 일개 하급 무관이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었다면

 


임진왜란 당시 일찌감치 왜적이 승리했을 것이다.

 

( 야마토 vs 비스마르크??

역사의 if 놀이 중에 이것만큼 가장 가능성이 높고 소름 끼치는 if 놀이가 없다. )

 




병졸 수십명을 관리하는 하급관료에 불과한 만호 ( 정4품으로 품계는 높으나 조선에서 실질적으로는 정5품 군수 정6품 현감보다 훨씬 못한 직위였다. 비교하자면 군수 현감은 시장이고, 만호는 시골마을의 ‘조금 병력이 많은’ 경찰 지서장쯤 되겠다. 이는 만호란 직위가 지방민을 회유하고 격려하기 위한 명예직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나타난 품계와 실제상의 괴리였다 ) 한 명이 무려 조선의 북방작전을 총괄하는 쓰리스타급 북병사에게 죄를 추궁당해 사형선고를 받고 잡혀 있는 상황,

 

근무 시간에 술을 마셧다거나 지방유지들한테 용돈을 좀 받아썼다거나 하는 작은 죄도 아니요 무려 북방경계선이 뚫리고 개척민들이 우르르 잡혀가게 한 중죄를 지었다는 혐의를 받은 상황,

 

조정도 군부도 백성들도 이 사태에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시골의 무명 하급 무관이 모든 책임을 지면 누이(군부)좋고 매부(조정) 좋고 만사형통 유쾌상쾌 끝나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충무공의 목숨을 구했을까?

 


 

바로 임금 선조 였다.





유사는 다음과 같히 말한다. “ 이일은 부끄러운 생각에 기가 꺾이어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결박한 채로 압송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순신의 죄가 아님을 살피고 이르기를, “순신의 죄는 패군에 비할 바는 아니니,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스스로 공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일이 충무공을 바로 처형하지 않은 이유가 정말 충무공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필자의 생각은 유사의 저자처럼 충무공을 미화하려는 시각과 약간 다르다. 충무공이 말하는 증거가 명백하니 함부로 처형했다가는 나중에 충무공을 과잉처벌했다는 ‘또 다른’ 책임을 지게 될까봐 차일피일 시간 끌다가 조정의 추궁에 ‘공을 넘기는’ 수준으로 ‘사실대로‘ 보고한 것이라 생각된다. ( 이래서 공무원 사회던 회사던 증거가 중요하다 증거!! 충무공이 군대를 늘려 달라고 요청했었다는 증거 한 줄이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아무리 충무공이 떳떳하게 항변했어도  '유능한 공무원' 이일 앞에서 증거가 없었다면 어땟을까??  ) 처세에 능수능란한 공무원의 표상인 ’이일’님 되겠다. 쌀 직불금도 적당히 받아드실 줄 알고 그러면서도 결정적일 땐 슬쩍 물러날 줄도 알고.

 


( 만약 당시 북병사가 원균님 같은 무댓뽀 님이셧다면... 후덜덜.

“내 사전엔 선참후계 밖에 없다.!!” by 원균 )

 

 

자 그렇게 공이 조정으로 넘어왔다. 누가 성난 민심의 돌을 맞겠는가. 어떤 관료가 북방 경계선이 뚫리고 조정에 대한 신뢰도 상실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성난 민심을 직접 상대하여 충무공을 옹호하려고 했던가.  선조 당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민중의 목소리가 크고 민심이 많이 반영되는 시절이었다 .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일개 하급 군관‘ 충무공의 목숨을 살리고 보호한 사람이 바로 국왕 선조였던 것이다.

 


이후 충무공은 다음 해 시전부락 토벌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백의종군형에서 풀려난 후 ( 참고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던가 ) 오히려 임금의 눈에 띄여 전격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며 ( 현감은 정5품직으로 만호보다 낮으나 당시 기준으론 이쪽이 오히려 승진이다 ) 계속 승승장구하여 임란 1년전에는 무려 정3품 ( 오늘날 용어로 낙하산 ) 무려 10여개 고을을 다스리는 전라좌수사가 된다.

 


다음 해 임진년, 사단장급의 전라좌수사로 5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왜적을 크게 무찌른 충무공은 두 번째 승전장계에 다음과 같히 적고 있다.

 

(당시 충무공은 출진하여 경상도 해역에 있었음 )

본도(전라도) 도사 최철견의 보고에 따르면 상께서 모모 일에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셧다고 하길래 , 상하를 막론하고 마치 부모를 잃은 듯 통곡하였습니다. ”

 

필자는 한참동안 이 구절을 당시 유교적인 관념에서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길래 관념적으로 써 놓은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 녹둔도 전투 사건 을 찬찬히 읽다보니 이 구절이 거짓으로 아첨으로 써 놓은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임금 선조는 무명장수 충무공의 목숨을 구하고, 충무공을 높은 관직으로 발탁해 준 실제 은인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임진년 이때까지는 !

 



이래도 선조를 그냥 찌질하기만 한 임금이라 하겠는가.

 




다시 4년전으로 돌아와서, 임금 선조가 충무공을 구해준 이유는 무엇일까.

 

유사나 충무공의 후대 업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무공의 장재를 알아본 까닭이다 라고 말하기 쉽다. 실제로 충무공은 당시 비록 관직은 낮으나 ‘용감하고 군사에 밝다‘라고 항상 추천받고 칭찬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일개 조산만호가 훗날 나라를 구할 사람이 될 줄 어느 누가 알았을까. 아무리 훗날 뛰어날 것 (처럼) 보여 봐야, 일개 만호 따위야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데 바치면 뭐 손해볼 거 없는 장사 아니었을까. 서구화된 개명 천지 젖과 꿀이 흐르는 민주주의의 천국 자유대한에서도 무슨 일이 터지면 ( 희생양으로 ) 경찰서장 옷 부터 벗고 시작하는거 아닌가.   



( 토정 이지함 선생은 충무공이 나라를 구할 지 알았을까? by 에로거북이 ) 


 

필자가 생각하는 선조가 충무공의 목숨을 구한 이유는 선조의 말 그대로다. 이 패전이 충무공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무공에게 충분한 병력을 제공하지 못했고 중과부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은 열심히 싸웠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현명한 군주 ( 혹은 조직의 상관, 어떤나라 대통령, 은하제국황제 뭐든 좋다 ) 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조직의 신상필벌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그 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임금 선조는 비록 패전했지만 열심히 싸운 충무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민심의 돌팔매를 맞기로 나선 것이다. 이일을 처벌할 수 없는게 당시 이일은 북방방어의 핵심이니 ( 동시에 적절하게 빠지실 줄 아시는 ‘유능한’ 미꾸라지 공무원님이시니 ) 이일을 처벌하는 것은 북방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는게 되기 때문이다.

 

곧 임금 선조는 조직의 신상필벌의 원칙이 최대한 적용되도록 하겠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실제로는 죄가 없는 충무공에게 억울한 처분이 가지 않게 하면서 당시 체제의 핵심인 이일과 미꾸라지공무원들은 또 적절하게 긴장 관계로 유지시켰으며 또한 성난 민심까지 스스로 아우르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실제로 선조시대를 찬찬히 살펴보면, ( 임진왜란이 비록 모든 걸 파괴해 놓긴 했지만 )  임란 전 30년간 조선은 그 어떤 시대보다 태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학, 지리학, 과학, 기술 등 조선의 주요 발명품은 모두 선조시대에 가장 발전했으며 혹은 발전의 기틀을 잡았다. 비록 사치에 젖어가는 면도 있었지만 남녀노소 배고프지 않고 잘 살던 시대였다. 물론 요 순 임금의 태평성대에 왕도낙토 이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가진 자 더욱 잘살고 못가진자 여전히 못살고 미꾸라지 이일이 성웅 이순신을 죽일려고 하던 시대였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보자면 정치가 적절하게 기능하던 시대였으며 그 중심에 국왕 선조가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임란 전 선조의 융성한 정치를 당나라 현종의 개원지치(開元之治) 와 비슷하다고 본다. 어 선조한텐 양귀비는 없구나. 물론 도요토미는 안록산이 아니다. )

 



물론 필자는 후일 정치력이 급속도로 감소하여 맨날 갈팡질팡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충무공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트집을 다 잡고 억압하던 선조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필자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이유는 이 사건이 훗날 충무공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국왕이 ( 그것이 비록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것은 아니던 간에 ) 노고를 알아주고, 공과를 정확하게 판단해주고, 목숨도 구해주고, 높은 관직에 발탁도 해주었다. 고작 ‘죄지은 말단 관료‘ 그것도 '맨날 상관이랑 푸닥푸닥 부딪히는 일만 많아서 그 나이에 고작 만호나 하던 말단 관료' 에 불과했던 충무공 입장에서 얼마나 감동이었을까. 그야말로 목숨 바쳐 충성하고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뜻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 무슨 만화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능력은 있는데 아부를 못하는 성격 때문에 승진도 못한 궁상맞은 초로의 중년 형사  . 조용하게 남은 인생이나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그에게 하필이면 그가 책임진 구역에서 터지는 중대한 사건. 사건 관련되서 상관 때문에 뒤집어 쓴 억울한 누명. 그리고 사회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누명을 벗게 되는 주인공 ! 훗날 그 지역 경찰서장으로 승진한 그가 사회를 위협하는 사상 최대의 흉악한 범죄조직과 벌이는 한판 승부!! 뛰어난 지도에 일망타진되는 범죄 조직!! 그러나 '정치적 인간'인 시장의 음모와 배신 끝에 비록 총탄에 쓰러지지만,  쓰러지면서 사회에 역할을 다한 것을 생각하며 입가에 행복하고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우리의 주인공!!  )





비록 훗날 ( 정치적 이유로 ) 선조에게 누명을 쓰고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 정유년 충무공이 반역죄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어머니는 사실상 선조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 , 피땀 흘려 키운 수군은 원균이라는 무뢰배가 나타나서 다 망쳐놓는 모습도 보셔야 했지만 ,

그래도 나라에서 넘치는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끝까지 보답했고, 무관이라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으며, 신성한 임무에 목숨을 바친 충무공의 인생은 한 남자의 인생으로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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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은 어떻게 발탁 되었는가? 2008/10/31 22:46 #

    임진왜란 - 2 페로페로님의 블로그로 트랙백 (현재는 링크가 없습니다)페로페로님의 역사연재물을 보다 보니 나 자신도 궁금해 진 점이라 약간 뒤져보았다.페로페로님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기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반년동안 5번의 인사발령과 승진. 기적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인사였습니다.어떻게 이런 기적적인 인사가 벌어진 것일까? 그 기적의 결과가 우리나라의 위기를 건져올렸으니 궁금해야 마땅한 일인 것 같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작년에 광...... more

  • 1587년 녹둔도 전투는 "패전인가?" 2008/11/01 02:59 #

    선조는 과연 찌질하기만 한 군주였을까? 에서 트랙백. 읽다 보니, 녹둔도에서 충무공의 죄과와는 관계없이 전투 자체는 패전이라고 보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것 같아 첨언합니다. 1. 일단 녹둔도에 대해 잘 알려진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강조 처리 합니다) 《 선수 021 20/09/01(정해) / 적호가 녹둔도를 함락시켜 둔전이 폐지되다 》 적호(賊胡)가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켰다....... more

덧글

  • 나아가는자 2008/10/31 21:59 # 답글

    역사는 역시 여러가지 측면에서 봐야 제맛. 잘 읽고 갑니다.^^
  • 에로거북이 2008/10/31 23:04 #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인적인 의견을 써놓은 것 뿐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사실 누가 다 알겠습니까.
  • 심재호 2008/10/31 22:44 # 삭제 답글

    아무리 생각해도 이종찬 장군과 비슷한 우호와 적대관계를 지내셨군요...
  • 에로거북이 2008/10/31 23:05 #

    유능한 장군은 권력자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는것 같습니다.
  • 초록불 2008/10/31 22:47 # 답글

    문득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 트랙백 했습니다.
  • 에로거북이 2008/10/31 23:06 #

    초록불님의 트랙백을 받아보니 영광입니다. ^^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명확한 사실관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highseek 2008/10/31 22:49 # 답글

    저래서.. 선조는 사실 귀신에 씌였다는 소설이 만들어졌죠;;
  • 에로거북이 2008/10/31 23:09 #

    ㄷㄷ; 그 소설이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괴기잡담을 좋아하는 관계로...ㄷㄷ;;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게 귀신에 씌인 거 아니란 겁니다. ^^;; 신상필벌을 정확하게 하려는 현명한 군주 ( 선조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 ) 의 지극히 당연한 행동일 뿐입니다.

    어디서 듣기로 선조가 조선 5대 명군에 든다더군요. 임란 전 28년간의 통치시기 이야기이겠지만 ...
  • highseek 2008/10/31 23:15 #

    그러니까.. 그렇게 현명하던 선조가 나중에 갑자기 이순신을 처형하고 원균을 등용한 것은 귀신에 씌인 게 분명하다! 라는 거였죠..;;

    잘 기억은 안나는데.. 왜란종결자였나? 아마 그랬던거 같습니다. (정확하진 않아요;ㅁ; 본지 워낙 오래라..)
  • 에로거북이 2008/10/31 23:22 #

    왜란종결자 군요. 저도 조금 보다 말아서..

    지나치게 공을 세운 장군이 있으면 견제용 대항마를 세워야겠죠.

    귀신 씌인 것으로 보일 정도로 타락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한숨)
  • ㅁㅁㅁ 2008/10/31 22:51 # 삭제 답글

    선조의 찌질함은 유능함에 기인하죠. 너무나 멀리 내다봤기에,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만든 양반이 바로 선조이니 -_-; 하여간에 이 양반이 적당히 무능했다면 임진왜란이 그렇게 질질 오래 가지도 않았을테죠.
  • 레이니 2008/10/31 23:06 # 삭제 답글

    선조가 인조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2대 찌질이 왕이 된 건 저 이유가 아니죠.
    한성까지 왜군이 쳐들어오는 지경에 이르자, (당시 유교 관념상) 백성의 지아비를 자처하는 왕께서 친히 야반도주를 행한 점과 그 도주과정에서 보여주는 찌질함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 살겠다고 한강다리 끊고, 여차하면 일본으로 뛸 생각까지 한
    이승만이 두고두고 욕먹는 점과 유사합니다.)

    결사 항전의 옥쇄를 위한 전략적 후퇴를 했다면 저렇게까지 평가받지 않았겠죠.
  • 에로거북이 2008/10/31 23:53 #

    1. 말씀하신 부분 분명 통치자로서 비난 받을 일들이긴 합니다.

    2. 역사학자들은 선조를 2대 찌질이왕으로 평가하는게 아니라 조선 5대 명군중 한명으로 평가한답니다. ( 오래 전에 들은 거라 출처가 ㅠㅠ.. 하여튼 확실합니다 ) 실제로 충무공 발탁 뿐만 아니라 지도, 의학서적, 철학서적, 과학서적, 기타 업적 등 선조 28년의 태평성대 동안 이루어진 업적이 타 시대를 능가하는 게 많습니다.

    3. 야반도주 안하면 왜군한테 잡히고 왜군한테 잡히면 나라가 망합니다. 야반도주 가 아니라 더 찌질한 도주, 얼굴에 검댕 칠하고 하인 옷 입고서 래도 도주해야 합니다. 이승만도 실제로 일본까지 튀지 않았듯이, 선조도 명나라까지 튀지는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킬려고 노력했습니다.

    불리할땐 튀어야죠. 거짓말해서래도 튀어야죠. ;;

    4. 선조가 진정 찌질이로 취급받게 된 건 도주보단 이후 충무공에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씌우고 가혹하게 견제하고 괴롭혔다는 점이겠죠. 이후 선조는 후대 왕들에게 마치 '그 당시 임금이 없었던 것 같은' 혹은 '역사책을 덮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쓰레기 임금으로 취급당합니다. ( 그렇게 들었습니다. ㅠㅠ 역시 오래돼서 출처는 죄송 )

    역시 이전 평화시기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충무공에게 한 어이없는 가혹한 누명들 때문에 그렇게 비난받는 이유가 제일 큽니다. 선조 이후 왕들은 선조가 충무공한테 한 짓이 너무 미안해서 계속해서 작위를 추증하고 후손을 우대해 줍니다.
  • 레이니 2008/11/01 01:51 # 삭제

    ^^; 글을 적다보니 태클 비슷하게 되어버렸습니다만, 사실 관계를 하나 더 첨부하자면, 선조도, 이승만도 튀지 않은 게 아닙니다. 못 튀었답니다. (don't가 아니라 can't)

    선조의 경우에는 항전을 위하 도주도 아니었을 뿐더러 명나라의 거부로 입국 좌절, 이승만의 경우에는 일본으로 튈 경우 이전에 해온 짓(방송으로 직접 서울 사수하겠다고를 외쳐놓고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 남으로 도망감)이 있어서 입지가 불행해질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운 좋게 전세 역전!!

    도주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얼마나 찌질했는지 백성들이 왜군에서 도주로를 일러 받지질 않나, 왕자는 자진납세당하고... 저도 다른 업적을 보고 선조를 옹호하고 싶지만, 도주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나중에 팽시킬 일등 알면 알수록 당췌 용서가 안되는 왕입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전후 조선 인구 변화를 찾아보시면, 아마 이해하실 듯..)

    나중에 시간 되시면 책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선조의 경우에는 추천할만 책은 모르겠고, 이승만의 경우에는 "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이 볼만 합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암튼 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 그럼 수고하세요. 즐거운 주말 되시길...
  • 【天指花郞】 2008/11/07 23:49 #

    예? 이박사가 한강다리 끊으라고 지시한 적이 있던가요. 한강다리 끊으라 한 건 뷩쉰 채병덕이죠. 죽은 건 애꿎은 공병감이고. -_-;;

    이박사가 일본으로 튈 궁리 했다는 소리는 더더욱 처음 듣는군요. 대한민국 역사상 이박사만큼 반일감정 철저했던 양반도 없을텐데요(친일파 청산 문제가 걸리기야 합니다만). 미군의 일본철수 계획 몰래 전해듣고 개난리 피운 것도 이박사고(정일권 장군 회고록) 재일교포가 참전했다가 부상 당해서 병원에 누워있는 걸 어쩌다 자위대가 참전했다고 잘못 오해해서 "자위대 상륙하면 바로 박살을 내 버리겠다!"고 난리친 것도 이박사인뎁쇼(이건 하도 여러 곳에서 나오니). -ㅁ-;;
  • StarLArk 2008/10/31 23:20 # 답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 2008/11/01 01:0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에로거북이 2008/11/01 08:06 #

    전 개인적인 낙서장 대신하는 블로그에 불과합니다. 도움이 안될 듯 싶군요 ^^; 다른 유명블로거들께 부탁드리는게 더 적합할 듯 합니다.
  • 2008/11/01 01:4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에로거북이 2008/11/01 20:56 #

    여러 면에서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건 정리해서 포스팅으로 올리겠습니다.
  • LYS 2008/11/01 01:45 # 삭제 답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에로거북이 2008/11/01 08:16 #

    감사합니다. ^^
  • Mr.리로이 2008/11/01 02:01 # 삭제 답글

    엥 그냥 유성룡이 이순신 추천한거 아니에요?
  • 에로거북이 2008/11/01 08:09 #

    통상께서는 원균 때문에 당한 정유년의 백의종군 이전에도, 억울한 누명, 백의종군 및 사형 선고의 전력과 그것을 구제받은 전력이 이미 한번 있으셧답니다. ㄷㄷ;


    저는 이것이 인물의 성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답니다.
  • Luthien 2008/11/01 03:04 # 답글

    녹둔도 관련 트랙백 하나 남깁니다.
  • 에로거북이 2008/11/01 08:15 #


    상세한 트랙백 내용 정말 감사합니다. ^^ 저는 그냥 여기저기 눈팅하고 ( 덕분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 ) 떠돌아 댕기는 정도에 불과한데 관련된 명확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서 트랙백 받으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역시 선조 혼자서 충무공을 구했다고 볼 수 있는건 아니군요. 정언신 이라던지 북방개척과 관련된 고위 관료들의 암묵적 책임 관계가 연계되어 있었군요. 이런 복잡한 정치지형 속에서 '( 죄를 떠넘기는데 ) 유능한' 공무원 이일이 더욱 돋보입니다. 물론 최종결정자인 선조가 그렇게 떠넘긴 죄를 현명하게 살피고 이순신 이라는 듣보잡 말단 관료의 목숨을 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p.s. 만약 충무공이 '듣보잡'으로 그때 처형되었더래도 훗날 선조실록 에서 그때 이일이 보고한 ( 이일은 조선의 대 여진전선을 총책임하는 막중한 권한을 가진 장수랍니다 ) '패전'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그려졌을까요?

    아니 조선이 이미 망했기에 선조실록 자체가 없었겠지요.

  • 개발부장 2008/11/01 08:40 # 답글

    임란 이전기 선조에 대해 조금 놀랐네요. 감사합니다.
  • 을파소 2008/11/01 11:42 # 답글

    선조가 5대 명군에 들어간다는 말의 출처는 신봉승의 저서 '성공한 왕 실패한 왕'입니다. 신봉승씨가 조선왕조 5백년으로 유명한 사극작가이며, 그것이 요즘 사극과 비교하면 개념사극이었지만, 분명 사학자는 아니죠. 제가 알기론 학계에서 5대 명군이라는 걸 정한 적은 없습니다.

    신봉승씨는 선조를 성공한 왕으로 꼽았지만...왕권유지와 강화가 기준이라면 분명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위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평가죠
  • 에로거북이 2008/11/01 18:43 #

    아 그 말이 신봉승씨의 말씀이었군요. ;; 정보 감사합니다.

    ( 이제 저런 말은 쉽게 못하겠네요. )

    조선을 위한다는 측면이 무슨 측면을 말씀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최소 저 녹둔도 전투를 둘러싼 신상필벌의 원칙 적용과 그 정치적 처리 솜씨는 대단한 건 맞는 듯 싶습니다. ( 그냥 찌질 임금도 한 개쯤은 잘한 게 있다 정도로 이해해야 할까요? 전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

  • 애독자 2008/11/01 21:12 # 삭제 답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포스팅에서 녹둔도 이후 처리과정을 보고나니 선조가 더더욱 한심해보입니다. 당시의 선조의 판단과 행동은 전혀 현명한 게 아닙니다. 결과론적으로 녹둔도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자이자 원인제공자라할 수 있는 이일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채 계속 승승장구했고 반면에 사건을 예방하려고 했고 또 최선의 수습을 했던(그렇게 볼 수 있는) 충무공만이 처벌당했다는 점에서 신상필벌이 전혀 엄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명확한 증거인 공문서가 남아있었으니 현명하지 않고 일개 범군이라도 전후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전 선조기가 태평성대였던 것은 선조개인의 공적이 아니라 봅니다. 오히려 태종때부터 시작되어 배출된 여러 명군 및 보통은 되는 왕들의 치적의 결과가 '우연히' 선조대에 꽃핀 것 뿐으로 선조 자신의 치적에 의해 발생된 결과물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리고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려다가 명나라의 거부로 못가자 어쩔 수 없이 싸운다는 선택지가 남은 것에 불과하죠. 어떻게 봐도 선조는 암군입니다만......
  • 에로거북이 2008/11/01 21:29 #


    1. 전체적으로 충분히 저와 다른 시각으로 보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선조를 명군이라 판단하게 되었던 이유는 듣보잡 지방하급무관 이순신이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 보다는, 임란 전 평화로웠던 20년간의 수많은 치적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님의 말씀처럼 이전 왕들의 덕택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업적들이죠.



    2. 그러나 다시 생각해도 녹둔도 전투 처리는 참 멋지다는 생각밖에 안드는게 사실입니다.

    충무공과 이일간의 신상필벌이 엄정하지 못했다고 하시는데,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 북방작전을 총괄하고 있고, 충무공의 직속상관이자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가 북병사 이일입니다. 그 이일이 충무공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군령입니다.

    전선에 나간 장수의 군령을 국왕이 뒤엎는다는것 자체만 해도 견책입니다. 또한 국왕 스스로가 큰 정치적 부담을 지는 용단인 것입니다. 위에 여러모로 적어두었지만, 누가 봐도 패전의 정황이 '명백'( 군졸 수십인 전사, 개척민 수백 포로화 )한 상황, 힘없는 듣보잡 지방무관 한명한테 책임 뒤집어 씌우고 성난 민심을 무마하는게 제일 편리한 해법이거든요. 이일이 그랬듯이.

    그런데 선조는 '그러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의종군으로 대체하여 목숨을 구해 준 후 ( 사실 백의종군은 절대 가벼운 형벌은 아닙니다 ) 복수전에 참여시킴으로써 훗날 나라의 동량이 된 훌륭한 장수를 잃지 않고 키워낸 것입니다.



    물론 훗날 선조가 충무공한테 한 짓거리나 임란 때 도망간거라든지, 공신책봉, 명나라 장수한데 굽신거린거 등등 찌질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이일 등 기존 세력과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충무공의 목숨을 구하고 다시 재기할 수 있게 적절하게 대처한 것은 보통 솜씨로는 하기 힘든 일이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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